玄覺 스님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류근일
하바드 출신 불교 승려 현각(玄覺) 스님. 그가 한국불교 조계종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내가 어떻게 그 조선시대 정신에만 어울리는 교육(을 하는 조계
종단)으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서양 사람들, 특히 서양 여자들을 보낼
수 있을까?”
“한국 선불교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누구나 자신의 성품을 볼 수 있는 그
자리를 기복 종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기복 = 돈’이기 때문이다. 참 슬픈
일이다”라고 그는 개탄했다.
현각 스님이 그 어떤 인연법(因緣法)에 따라서인지 처음 한국에서 구도(求道)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필자는 그분이 책을 통해서나 인터뷰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에 항상 마음 깊이 공감하곤 했었다.
한국적 종교문화에 비해 서양인인 그분의 ‘지적(知的) 분위기'가 필자에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이걸 “신앙이 아직 덜 뜨거워서..”라고 일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덜 뜨거워도 좋으니 나에겐 그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지적(知的) 분위기’라고 필자가 말하는 건 “종교는 지식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종교를 신실하게 믿더라도 지성적인
사유(思惟)의 형식을 함께 껴안고 가면서 믿어도, 아니, 그러는 게 훨씬 더
좋지 않겠느냐는 것뿐이다.
예컨대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지동설 아닌 천동설을 ‘진리’라고 권력으로
강제하거나 맹신하는 게 과연 참 종교적 자세였느냐?”는 물음이다. 더군다
나 근래에 와 일부 종교인들이 특정 정치성향으로 급경사하면서부터,
필자의 실망감은 더 커졌다.
성당 문 위에 “4대강 지지자들일랑 이번 지자체 선거에서 찍어주지 말자”는
현수막을 일부(소수이겠지만) 천주교 사제들이 내걸질 않나, 도심 폭력시위
책임자 한상균이 부녀자 신도들 앞에서 빤쯔 바람으로 난리법석을 피우는데도
일부(소수이겠지만) 불교 승려와 단체가 그 범법자를 마치 '쫓기는 피난민'
인양 봐주질 않나...하는 등등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고서 필자는 "종교를
믿는다"는 게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를 헷갈릴 지경이 되었다.
그런 종교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는 세속적인 정치-사회 문제와 관련해서
도 정의와 진리에 대한 배타적 해석권(解釋權)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 마디로
그냥 씩 웃어주겠다.
현각 스님의 떠남도 이런 한국 종교계의 비(非)종교적 어수선함에 대한 환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교적 영성-불교적 진리-불교적 구도(求道)
자체를 떠난 건 아닐 것이다.
종교적 심성을 떠난 건 더더욱 아닐 것이다. 아니, 그는 오히려 이 떠남을 계기로
종교적 영성이 더 심화될 것이라 믿는다. 그의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불상한건 신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