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소년중앙 창간호 모습(1969년)
멋쟁이 신사는 자전거 탄다?
안면도에서 최초로 개장된 해변인 방포해수욕장의 1960년대 사진자료로서 선글라스끼고 한껏 폼낸 중년신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동대문스케이트장에서 육영수여사와 박근혜
최초의 세단 승용차 <새나라>(1962년). 1962년 - 우리 손으로 생산한 최초의 세단 승용차 `새나라`가 1962년, 경기도 부평 새나라자동차 공장(현 GM대우자동차 공장)에서 첫선을 보였습니다. 꽃다발과 오색풍선으로 한껏 멋을 낸 채 말입니다. 빗속이었음에도, 내의 차림으로 우산을 받쳐든 까까머리 아이들과 어른들은 목을 길게 뺀 채 `새나라 생산 제1호`라고 쓴 팻말을 단 멋진 세단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4도어 뒷바퀴굴림형(후륜구동형)으로, 4기통 1200㏄(55마력) 엔진을 장착한 차였지요. 1955년부터 생산된 지프형 `시발자동차`는 새나라에 곧 자동차의 왕좌 자리를 물려줍니다.
서울시청 옆에서 스케이팅을 하는 시민들
40여년전 서울시내의 정감이 어린 모습이 담긴 사진 한장이 발견됐다. 31일 서울시에 따르면 이날 오전 충북 음성체육관에서 개최된 서울시와 충청북도의 1사1촌 자매결연 행사에서 이명박 서울시장은 이원종 충북도지사로부터 40여년전 서울시청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선물받았다. 사진에는 시청 옆 덕수궁 내 얼어붙은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수십명의학생과 어린이, 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의 나각순 연구원은 "당시에는 겨울이면 덕수궁이나 창경궁의 얼어붙은 연못에서 시민들이 스케이트를 즐겼었다"며 "태평로가 확장되기 전이라 덕수궁 내 연못도 지금보다 훨씬 컸었다"고 말했다. 이 사진은 이 지사가 광화문전화국에 9급 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고시를 치르기 위해 주경야독하던 시절 행정법 책을 쌌던 달력 사진으로 최근 이 지사가 보관중인 책들을 정리하던 중 발견됐다. 시 관계자는 "지난해 서울시에서 조성한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을 떠오르게 한다"며 "레저시설이 별로 없던 시절 시내 스케이트장은 큰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해말 가로 40m 세로 30m 규모로 300∼400여명이 한꺼번에 이용할수 있는 서울광장 스케이트장을 조성했었다. (서울/연합뉴스)
김정일의 김일성종합대학 학생시절 사진 첫째 사진 설명 조선중앙텔레비젼은 19일 방송한 기록영화에서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시절 군사훈련을 하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내보냈다. 조선중앙TV촬영 (서울=연합뉴스) 두번째 사진 설명 조선중앙텔레비젼은 19일 기록영화를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재학시절 공사현장에서 작업중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을 내보냈다. 방송은 어떤 공사였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조선중앙TV촬영 (서울=연합뉴스)
한국 최초의 누드-루크[ 선데이서울 68년 11/17 제1권 제9호 ]
영화 <이상의 날개> 포스터 1968년 최인현감독, 신성일,남정임,문희,최불암,박기택등 출연한 영화의 포스터.
국민학생 보리베기 동원. 그 때는 빠짐 없이 논이며 밭에 보리를 심었다. 당시 농촌인구가 지금처럼 적은편은 아니였으나 기계화가 되지 않아 보리 베고탈곡을 마쳐야 모내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농번기 휴가가 있었고 휴가 전 초등학교 3학년부터 도시락 싸 가지고 며칠을 동원되어 보리베기에 나서야 했다. 당시 서로 베어 달라고 했었고 서툰솜씨로 베어야만 했던 당시 너무 힘들었다. 베고 삯을받아 학교 도서를 사는 등 사용되었다.
60년대 힘있는 기관의 야유회 상당히 힘있는 기관의 직원들이 야유회를나왔다. 마이크까지가지고 나온걸보니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직원의 머리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투피스를입은거며 한껏 멋을 낸 모습인 것 같다. 60년대 모습이다.
윤정희 취입 음반 <금수강산>. 1968년 <금수강산>에 출연하면서, <윤정희>는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른 음반을 출시하였다. 원래 가수 <김세레나>가 불렀던 곡을 재취입하였으며, A면은 <김세레나>가 B면은 <윤정희>가 불렀다. 상단의 레코드 자켓을 보면 <윤정희>의 모습이 보이며, 영화 <금수강산>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강찬우> 감독의 작품으로, <남궁원>, <문정숙>등의 배우들이 공연하였다. 1968년 서울/국도극장, 부산/대영극장 등에서 개봉하였다. 참 귀한 자료다.
이동하는 야외 가설극장
60년대 파티장에서의 남자배우들 1960년대 초반으로 추측되는 사진이다.
당대의 인기 남자배우들이 파티장소에서 술잔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황해>, <윤일봉>, <주선태>, <최무룡>,<김진규>, <김승호>등 한 시대를 풍미한 남자배우들의 모습인데, 40여년이 지난 지금 <주선태>, <최무룡>, <김진규>, <김승호>등의 배우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으며, <황해>씨는 현재 투병중인데 아주 절박한 상황이라고 한다. 앞으로 40년후, <권상우>, <장동건>, <이병헌>등 현재의 톱배우들이 원로가 되었을때? 청춘극장 회원들중에서 생존해 계시는분이 몇이나 될까? 가끔 이런 사진들을 보면 “인생의 덧없음”을 더욱 실감한다. 조선말기 사진(수원과 인천 우편일부인)-
수원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華城)의 북문으로 정조 때 건축되었다. 서울의 남대문과 비슷한 형태지만 규모가 더 크고 바깥에 옹성을 갖추었다. 무지개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양쪽 계단으로 오르게 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2층 건물.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아래가 넓은 데 비해 2층은 좁은 형태이다. 정면에 ‘수어장대’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수원 화서문(華西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
단층 누각에 옹성을 쌓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화성은 남문인 팔달문과 북문인 장안문이 통행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화서문은 비교적 한적한 편이었다.
수원 화홍문(華虹門).
수원 화성의 북쪽 수문으로 북수문(北水門)이라고도 불렀다. 7개의 석조 무지개로 수문을 만들고 수문 돌다리 위에 다시 처마 곡선이 유연한 문을 만들었다. 왼편 뒤쪽으로 장안문이 보인다. 주변의 자연풍광이 아름답다.
수원 전경. 멀리 화성이 보이는 수원의 모습. 동생을 업은 아이 앞으로 물이 마른 내와 다리가 보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다.
수원 화홍문과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왼쪽이 화홍문이고 오른쪽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가 방화수류정이다. 이 정자에 오르면 주변을 두루 살피고 경치를 즐길 수 있었다. 소를 매어두고 한가롭게 쉬는 농부와 주변 경관이 썩 잘 어울린다.
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화성장대(華城將臺).
성벽 정상에 있어 안팎을 두루 살피며 군사를 지휘하던 2층 문루다. 정조가 쓴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었다. 화성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불렀다.
화녕전(華寧殿). 정조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전각.
부왕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를 지극한 효성으로 받든 것을 본받고 기리기 위해 순조가 세웠다.
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인천항과 시가. 인천은 1883년 1월 개항했다.
서울의 관문인 만큼 일찍부터 도시가 발전하여 시가를 형성했다. 사진은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내려다본 인천항.
인천 일본인 거리 인천의 중심가.
일본식 4층 건물이 들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서양식 3층건물도 보인다. 한복을 입은 한국인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인천의 일본인 거주지.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는 일본인이 모여 사는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지금의 자유공원 남쪽이다. 사진은 일본인 거류자가 급증하면서 형성된 주택가 곳곳에 전신주가 서있다.
구한국시대 이중원형일부인. 이중원형일부인(二重圓型日附印)은 1895년 음력 6월1일(양력 7월22일), 우리의 우정사업을 재개(再開)할 때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한국시대 원일형일부인. 원일형일부인은 1898년부터 1905년까지 사용한 일부인으로 1898년에 들어와 전국 300여 도읍에까지 우체망이 급속히 확충됨에 따라 이전에 사용하던 이중원형일부인으로는 우체국의 구별이 어려워짐에 따라 원일형일부인으로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는데, 원의 중앙에 4대6 비율로 가로선을 긋고 상단에는 우체사명을 하단에는 연호, 발송년월일과 체송편을 넣었다.
구한국시대 외체일부인.
외체일부인은 1900년 1월 1일 우리나라의 UPU가입으로 외국간 우편업무가 시작되면서 사용한 일부인으로 1905년 6월 30일 한일통신조약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우체국이 일본에 강제접수 당할때까지 사용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외체일부인은 SEOUL(한성), FUSAN(부산), MOKPO(무안), GENSAN(원산), KUNSAN(옥구), MASANPO(창원), CHINAMPO(삼화), CHEMULPO(인천), KIENG-HUNG(경흥), SEOUL No.1 (한성지사1호), GWENDOLINE(은산우편물수령소)으로 모두 11개이다. 일제시대 사진(풍물) -5
탈곡
빨래하는 여인들
빨래하는 여인들
가마를 탄 상류층 부인
길에서 연날리기를 하는 아이들
잡화점
뱃사공
시장풍경
바느질하는 여인들
아이들
당나귀를 탄 남자
물장수
닭장수
낮잠자는 지게꾼
목화씨를 빼는 노인
낚시
절구질을 하는 여인
아이를 안은 여인
장옷을 쓴 여인 |